1. 개전 전의 상황
1979년 2월 17일 미국의 군사위성 'Big Bird'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중국-베트남의 국경지대에 전쟁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인공위성에 비친 중국군은 대량의 병력으로 베트남의 국경선을 두들기고 있었다. 이에 미국의 CIA를 비롯한 첩보부들은 놀람에 할 말을 잊어야했다. 그도 그럴것이 자기들을(미국) 패배시켰던 베트남을 군사/경제 원조로 도와주었던 반미혈맹의 나라가 바로 중국이 아니던가. 게다가 두나라는 같은 공산주의 이념으로 묶여진 형제국가가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는 한국과 일본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좋지가 않았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베트남을 자주 침공했고 베트남은 여러번 중국군을 패퇴시켜 중국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었다는 역사가 있다. 게다가 화교(재외 중국인)들은 동남아에서 흔히 그러듯 베트남에서도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동남아인을 비롯한 베트남인의 눈총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자기가 돈번다는데 뭔 비난이냐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사실 이 화교들이야 말로 그 나라의 부를 중국으로 빼돌리는 짭잘한 외화획득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옆나라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나 위쪽의 중국이 화교를 경제적 침탈의 도구로 사용한다고 여긴 베트남 정부는 자국의 모든 화교를 추방하는 외교적 조치를 실행하였고 이것은 당연히 중국이 전쟁까지 생각하게 하는 ‘강렬한 분노’를 불러왔다.
또 한가지 베트남 옆의 캄보디아 문제 또한 동남아시아의 '대형'인 중국을 열받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스탈린과 히틀러도 두손을 들 정도의 악명 높은 공산 독재자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붉은 크메르라는 뜻-크메르가 캄보디아인을 뜻하므로 ‘붉은 캄보디아’)가 론놀의 군사정권을 물리치고 1975년 캄보디아를 장악한 이래 캄보디아는 무시무시한 지옥의 세계로 탈바꿈한다. 원시공산주의를 신봉하던 폴 포트는 몇 가지 잔혹한 정치를 강행한다.
<생긴건 유순한 이웃집 아저씨같지만 하는 짓은 극악무도한 도살자였던 폴 포트>
1. 공산주의의 이념에 따라 전국의 산업시설을 폐쇄하고 모든 국민은 농장으로 간다(전인구의 농민화)
2. 시장경제체제를 부정하는 캄보디아에 화폐는 없다. 당연히 시장도, 회사도, 자본주의를 연상하게 하는 그 어떤-무엇도 없다. 모든 국민은 공동생산, 공동분배로써 크메르 루즈가 배급하는 식량을 먹고 살아야 한다.
3. 인텔리 반동분자(기술자, 식자, 대학 나온 사람 등등 먹물 좀 먹은 사람들)는 캄보디아에 있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모두 처형한다. (심지어는 안경을 껴서 인텔리같이 보인다는 이유로 처형)
4. 자본주의적 잔재를 없애기 위해 주요 교육, 의료, 위생기관 등은 모두 폐쇄한다.
5. 보다 완벽한 공산주의사회를 만들기 위해 각 국민은 <온산>이라는 제도로 서로를 감시한다.
덕분에 캄보디아는 전 인구의 25%인 150만명에서 2백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어갔다. 국민의 4명중 1명꼴로 저세상에 갔다는 소리니 참으로 참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 ‘킬링필드‘는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는데, 주인공이 넘어져 구덩이에 빠졌을 때 그 구덩이가 온통 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해골밭이었던 장면을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아무튼 이런 극악무도한 폴 포트는 이런 삽질에도 모자라 2가지 대삽질을 추가했으니 첫째가 바로 중국에게 기대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전통적으로 한국의 ‘혐일’만큼 중국을 싫어하며 중국의 영향력을 두려워하는 나라인 베트남은 이런 폴포트의 행동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둘째는 캄보디아-베트남이 수세기동안 전쟁으로 원한이 있던 나라였기 때문에 폴 포트가 캄보디아에 있는 베트남교민들을 혹독하게 탄압한 것이다. 이런 사정은 베트남으로하여 월남전이 끝난지 3년 반이 지난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캄보디아에 군사개입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12년간의 주둔과 전투에도 불구하고 폴 포트는 베트남에 의해 개박살이 났기는 했지만 완전히 박멸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캄보디아가 내전으로 개판이 되어가자 베트남군은 89년에 철군한다.
<캄보디아를 진격하는 베트남 정규군>
<베트남군에 의해 포로가 된 캄보디아군들.
이같은 전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캄보디아에는 진정한 평화가 오지 못했다>
어쨌든 이런 연휴로 베트남은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캄보디아를 무력침공했고 이것은 마치 중남미국가를 자국 뒷마당으로 여기는 미국처럼 동남아의 '따꺼'이신 중국의 코털을 건드린 것이었다.
또 공산주의계의 '본좌' 소련과의 계속되는 반목으로 인해 중국의 힘을 보여줄 본보기가 필요했고 베트남이 소련을 지지하게 되자 한번 쥐어박아 볼만한, 때리고 싶을 정도로 얄미우며 만만한 먹이감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런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에 78년부터는 국경지대에서 마치 남북한이 대치한 DMZ를 방불케하는 방송을 통한 욕설전이 전개됬고, 이런 험악한 분위기와 소규모 국경 충돌이 계속되자 본격적으로 이 지방에 군사력을 증강시키게 된다. 이 같은 국경의 상황과 여러가지 판단 끝에 전쟁을 결심한 ‘덩샤오핑‘의 중국은 1979년 2월 17일 베트남에 대한 응징을 강행한다.
<1979년 하노이 시내의 선전 포스터.
전통적인 적인 미국 외에 당면한 적인 중국이 추가되어있는 것이 보인다>
중국군은 당시 580만의 어마어마한 대군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중월전쟁에는 베트남의 온몸을 두들겨 팬다는 총력전, 전면전이 아닌 베트남의 머리만을 한 대 쥐어박는다는 ‘응징’을 목표로 하여 작은 수준의 병력을 파견하는 제한전, 국지전을 벌였는데, 이것은 몇 년 전에 중국사회에 피바람을 불러 일으켰었던 문화대혁명과도 관계가 있다. 당시 대숙청으로 인해 유능한 군 간부, 기술자등이 무더기로 없어져서 군대의 전투 수행능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전략 목표는 베트남의 북부만 공략한다는 개념 하에 ‘양더즈’ 지휘의 광저우 군관구의 20여만 병력으로 하여금 북부 베트남의 3개 도시인 랑손, 카오반, 라오카이의 3개 도시를 점령하는데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 5개 사단 10만의 병력을 선두로 북부의 소도시 몽카이, 하치만, 라이차우를 공격하여 진입로를 트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베트남군은 현재 대부분의 주요 정규군들이 크메르 루즈의 캄보디아를 박살내기 위해 파병(약 15만 병력)을 간 상황이라 본국에는 6개의 사단(북부에는 3개 사단 주둔)과, 공안부대라고 불리우는 2등급 부대-우리나라의 예비군같은- 10만명, 여성으로 이루어진 지원부대 등을 포함해 총 15만명 정도가 전부였다.
<중국군에 의해 포로가 된 베트남 여군.
이들 여군들은 전쟁기간 내내 모든 전투에서 남자들 못지않은 맹활약을 펼쳤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마저도 아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베트남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북부에 병력을 이동배치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은 중국의 보병과 전차를 평야지대였던 하노이 주변에서는 막을 수 가 없다고 판단, 북부 산악과 밀림지대에서 적을 최대한 고착시켜 섬멸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2. 개전
<결의를 다지는 중국군 전차병들. 오른쪽에는 59식 초기형이나 62식 경전차로 보이는 전차가 보인다>
개전이 되자 중국은 [먼저 까불은 베트남을 자위차원에서 응징하며, 베트남의 영토는 원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는데, 이에 베트남은 [웃기지마라 중국. 니들이 침공했으니 이젠 맞짱이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중국 인민해방군(People's Liberation Army, 이하 PLA)은 북베트남의 빽빽한 밀림을 벌채하거나 태워버림으로써 중국제 신형 63식 전차와 59식 전차를 앞세우며 막대한 보병을 투입했다. 베트남군은 산악과 밀림을 이용한 진지에서 종심방어를 실시하여 지뢰와 각종 화기로 잘 무장된 방어진지에서 싸우다가 불리해지면 차후 방어진지로 교묘히 후퇴하였으며 베트남군의 장기였던 역습, 기습, 매복, 유격전등으로 중국군을 전쟁 내내 괴롭혔다.
<전진하는 중국군 보병들>
게다가 당시로썬 고성능의 미국제 AN/PRC-6 무전기(대부분 베트남전에서 노획)를 이용하여 부대간 지휘/통신을 하고 휴대용 대전차무기인 RPG-7과 소련제 최신 대전차무기인 AT-3 새거 대전차미사일을 적절히 이용해 중국군 69식과 59식 전차, 62식 경전차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천안문 사태 당시 시위대와 대치중인 59식 전차. 아마도 59식 전차가 나온 사진으로썬 제일 유명한 사진이 아닐까 싶다>
<전쟁 기간 내내 중-베트남 양군에게 요긴하게 사용됬던 RPG-7을 든 중국군 병사>
그에 비해 중국군은 지휘/통제에 어려움이 따랐던 낙후된 통신체계 외에도 보-전(보병-전차) 합동전술이라고는 하지만 북베트남의 지형과 기계화전술의 미숙련으로 기껏해야 전차 뒤에서 보병이 졸졸졸 따라오거나 하는 형식이라 베트남군의 공격에 쉽게 보병과 전차가 분리되어 전차가 격파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군 숙청으로 지휘관의 질이 전반적으로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
<베트남군에게 격파된 중국군 전차. 62식 경전차로 보인다>
게다가 항일전, 국공내전, 항미원조전쟁(한국전쟁)의 경험으로 중국인민해방군으로써는 베트남에서도 이러한 보병의 대병력을 집중하여 작전지역내의 적보다 우세를 달성하여 돌입시킴으로써 적군을 포위, 섬멸하는 소위 ‘인해전술-Human Wave Tactics’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흔히 말하는 쪽수로 미는 무식한 전술이 인해전술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http://www.army.mil.kr/history/%C0%DA%B7%E1%BD%C7/%BF%EB%BE%EE%C7%D8%BC%B3/%C0%CE%C7%D8%C0%FC%BC%FA.htm 참조)
그러나 문제는 베트남의 지형, 베트남군의 화력, 경험, 훈련, 사기 면에서 인해전술이 먹혀들 상대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베트남군에게 포로가 된 중국군 보병. 베트남병사는 시모노프SKS소총을 손에 들고있다>
당연히 이러한 차이에다가 세계최강 미국과의 싸움에서 단련된 베트남군과 병력만 많을 뿐 전투경험을 비롯하여 많은 면에서 부족한 중국군과의 싸움은 이들에게 어려운 전투가 아니었다. 전투개시 3일이 되도록 베트남의 방어진지를 뚫지 못하자 중국군 수뇌부는 축차투입을 결정, 10만명의 대군을 또 다시 이 지역에 증원한다.
<전사한 중국군 병사. 전방의 베트남전선을 뚫기 위해 많은 보병이 희생당했다>
결의에 찬 중국군의 엄청난 병력이 쏟아오자 베트남군의 동단과 몽카이의 방어선은 무너졌다. 중국군은 휘하 병력을 다그쳐 손실을 무시하고 싸웠는데 동단과 몽카이 방어선을 뚫는데 약 2천여명의 병력이 전사했고 중국군 전차 수십대가 격파됬다.
<중국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베트남 여군. 역시 SKS를 들고있다>
28일에는 출혈을 감내하고 중국군이 점령한 동단시가 베트남군의 역습을 받고 다시 재탈환당한다. 베트남군은 대부분 보병의 ‘행군‘으로 느리게 기동하는 중국군과는 달리 월남전에서 빼앗은 수백대의 M113장갑차를 이용하여 빠르게 기동하고 있었으므로 손쉽게 예비전력을 이동시켜 중국군에게 역습을 가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972년 남베트남의 쾅트리에서 촬영된 남베트남군의 M113.
많은 수의 남베트남 M113이 북베트남군에게 노획되어 중월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올렸다>
3월 1일, 중국군의 항미원조전쟁의 정예부대들로 랑손시를 향해 전면공격을 감행하여 베트남군을 어렵게 축출하게 된다.
<격전과 중국군의 폭파로 철저하게 파괴된 랑손 시가지>
<중국군이 베트남의 시가지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
한편 공산주의계의 본좌이며 같은 공산국가이면서도 중국과는 한없는 라이벌인 소련도 이를 좌시하지 않고 있었는데, 중국이 베트남을 이길 경우 중국이 더욱 까불거라고 생각한 소련 정부는 '전투가 확대될 경우 될 경우 베트남에 원군을 파견하겠다'라는 성명을 발표해 중국을 크게 견제했다.
3월 2일 랑손을 둘러싼 전투는 최고조에이르러 결국 중국군이 랑손을 점령, 랑손시를 무자비하게 파괴한다. 랑손시는 중국군의 보복이었는지, 작전 상의 이유였는지는 몰라도 철저하게 파괴되어 말그대로 ‘초토화’되었다. 그러나 국제 상황도 점차 중국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으며, 막대한 전쟁비용, 투입한 병력의 피해와 피로도가 심각해 더 이상 전쟁을 벌이기 힘들자, 중국은 3월 6일 전투를 종료, 자국군을 철수시키기 시작한다.
3월 15일 중국은 종전을 선언하고 드디어 이 장렬했던 전투는막이 내린다. 중국은 대략 베트남군 4만여명, 베트남은 중국군 41705명을 섬멸(사상자, 포로 모두 합계)했다고는 하는데 이것은 공산권 국가들이 흔히 하는 과장이며 실제적으로는 워낙 자료들이 서로 달라서 쓰지 않지만 중국군이 확실히 베트남보다 피해가 월등하다고 한다.
<한 중국인이 과거 중월전쟁에서 전사한 가족을 위해 추모하고 있다>
베트남은 승리를 자축하지만 얻은 것은 캄보디아 침공과 중월전쟁으로 인한 영광뿐인 상처였다. '보트피플'같은 공산화의 부작용과 오랜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 막대한 전비 등으로 베트남은 수렁의 늪에서 허우적거렸고, 다행히 소련이 무너지면서 불러온 개혁과 개방의 바람, ‘도이모이‘같은 정책을 실시하면서 다시 동남아의 주요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한편 중국은 이 전쟁의 결과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중국군 수뇌부는 자국의 군대에 혹독한 매스질을 가한다.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의 경제력과 걸맞는 현재의 중국군이 태동할 수 있었던 개기는 이 중월전쟁이 끼친 막대한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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