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2개월간 나의 애마였던 K242에 대한 단상 내맘대로 Millitary

제대 3일 남은 말년 당시의 사진(오른쪽 옷 잔뜩 껴입은 인물이 접니다)

 

 제가 논산에서부터 열차를 타고 들어와 처음 가본 '자대'라는 곳의 연병장에는 한번도 보지못한 신기한 쇳덩어리가 서있었습니다. 육중한 덩치와 터프함을 자랑하는 한국형 장갑차 k242가 그놈이였죠.  

 
K242에 대해 설명하자면 우선 한국형 장갑차인 k200계열의 차량으로 1970년대부터 한국군에 들어온 미군의 M113계열 박격포 탑재차량(M106계열)을 본따 기계화부대 및 보병의 화력을 지원하는 개념으로 설계되었습니다.

<K242의 양키 아버지인 M106A3의 모습...
보아하니 포구 수입(포신 청소)을 하고 있군요.
참고로 미군이 두명씩이나 하는 더럽게 빡센 포구수입을 한국군은 한명이 합니다 ㅎㅎ>

 

242의 기본 차체는 오리지널 모델인 k200과 동일하지만 4.2인치 박격포의 탑재로 인하여 병력실이 개조되었으며(당연히 측면의 보병용 총안구는 폐지되었으며 박격포탄 수납공간 설치, 박격포용 포판 등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내부변경으로 인해 상부의 보병용 헷치가 원형의 포헤치로 변경되었고 병력하차용 후방램프도어의 총안구도 K242에서는 폐지되었습니다. 


<k242와 비슷한 m106의 일러스트>

 

내부의 구조변경과 외부의 박격포 부품 탑재로 인해 k242는 단차장 큐폴라만 가지고 있으며(대신 기존 K200 단차장 큐폴라에 있던 M60을 MG50/K6로 교체함) . 측면의 경우 기존의 k200에 달려있는 유격장갑(솔직히 장갑이라고 불리우기 민망하지만)을 제거하고 장갑차의 파괴를 대비하여 4.2인치 박격포의 걸침대, 포판, 단차장 큐폴라 좌측에 돌림판을 장착합니다. 

 

<미군제식명 M2중기관총-한국군은 MG50 / 신형인 경우 K6라 불리우는 녀석입니다>

 

이런 k242의 박격포 탑재의 경우 "차상포" 상태라고 불리워지며, 차체 내에 달려있는 회전 포판 위에 원래 4.2인치 박격포의 포다리와 포신(+포경)을 결합합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장갑차가 파괴되었거나 하는 유사시엔 포신과 포다리, 차체 외부에 장착되어있는 걸침대,포판,돌림판을 결합하여 지상포 상태를 만들수 있습니다. 

 

<오리지널 4.2인치 M30 박격포의 모습. 한국형도 신형 포판을 사용하는것 외엔 다른점이 별로없다.
향후 배치되는 120mm박격포로 교체되어 일선 부대에서 물러날 예정에 있다.
니가 그리울꺼야 똥포야~~>

 

주요제원은 기본 k200과 동일하며 기본형과 A1의 차이점은(제가 군에 있을땐 거의 기본형이었음) 기존 280마력의 D2848M 8기통 수랭식 엔진과 반자동변속기 대신 350마력의 D2848MT엔진과 자동변속기로 변경된 점입니다. 역시 기본형과 마찬가지로 하천도하능력이 있으나 화생방전을 대비한 양압장치(차내에서 외부와 동일한 압력을 발생시켜 외부의 오염물질이 차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장치)는 없습니다. 지휘장갑차인 277에만 양압장치가 달려있으며 K200이나 K242는 화생방 상황시 병력이 장갑차안에서 MOPP단계(화생방전을 대비한 임무형 보호태세)를 적용해야합니다...비좁은 장갑차 공간에서 MOPP를 수행한다는게 말이 쉽지 상당히 어려운 일이죠.

 
무장은 KM30 4.2인치 박격포 1문, 단차장 큐폴라의 mg50/K6 1정(큐폴라의 변경으로 M60은 탑재하지않는다) 탑승인원은 조종수, 단차장(분대장),사수(포수), 부사수(부포수), 탄약수의 5명으로 구성됩니다. 지상포의 운용 편제와 달리 1탄약수, 2탄약수가 없어서 유사시 분대원중 다수가 사망하면 조종수도 박격포 탄약수의 역활을 겸합니다. 반대로 전시에 장갑차의 궤도 등등이 끊어지거나 하면 분대원은 조종수를 도와 간단한 정비나 장갑차 궤도도 같이 갈아치워야 합니다. 한마디로 기계화보병은 만능이 되어야 합니다.  

 
도하는 군생활 당시 한번도 해본적이 없지만, 기동은 아주 많이 해봤기에 느낀것이지만 상태가 좋은 차량은 경우에 따라서 최고속도 74킬로를 뛰어넘는 속력을 발휘합니다. 제 경우 창원 정비창에서 갓 출고된 단차를 타고 자유로를 달렸을때 80킬로가 넘는 속력을 낸것을 본적이 있죠. 시속 80이상이 민간차량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궤도달린 알루미늄 덩어리가 시속 80이상으로 가는것은 상상외로 무섭습니다...

 

K200시리즈의 가장 큰 단점이라면 역시나 APC(Armored Personnel Carrier-직역하면 장갑화 된 병력 수송차) 답게 허접한 방어력입니다. 대전차지뢰, 기관포, 7호발사관(RPG7), 방사&곡사포탄 등등 k200시리즈를 위험하게 하는 요소는 너무나 많습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중에 RPG7의 원래 주인(소련)에게 RPG-7을 겨누고 있는 무자헤딘 게릴라>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급된 대전차화기이자, 소말리아에서는 헬기를 격추시키는 훌륭한 대공무기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알라께서 테러리스트와 반군들에게 점지해주신 요술봉으로써 곡사무기로도 쓰이는 전설의 대전차무기 RPG-7>

 

단순히 7.62mm이상의 소총탄(경우에 따라선 12.7mm탄)을 막을 수 있는 현재의 방어력으로는 주적인 북한군과 만날 경우 너무나도 불리한게 사실입니다. 중동전의 경우 이스라엘의 M113이 시리아와 이집트군의 RPG7에 의해 녹아버림으로써 이스라엘은 방어력 증가에 심혈을 기울이고 이것은 결국 전차를 기초로 하는 엄청난 방어력의 병력수송용 장갑차들인 아크차리트 Achazarit(아랍군에게 노획한 T-55차체), 나메라Namera(메르카바 MK1의 차체이용) 등등을 만들게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위 : t54/55를 개조한 아크차리트 APC / 아래: 메르카바 전차를 개조한 나메라 APC>

 

저런 장갑차는 둘째치고 북한군의 7호발사관(RPG-7)을 막을만한 슬랫아머(RPG펜스) 정도의 방어력 증강을 노려보는것은 가뜩이나 빠듯한 예산의 한국군에게 과연 무리일까요?  만날 해외파병부대 보낼때만 장착하지말고 국내 도입도 정말 절실합니다. 


<걸프전 당시 녹아버린 M2 브래들리의 모습. 아마도 오폭으로 인한 파괴로 보인다>

<RPG를 막기위해 온통 슬랫아머로 도배를 한 미육군의 스트라이커 장갑차>

 

여담이지만 저의 경우 전장에서의 장갑차(APC)의 맹점을 간접 체험한것은 다름아닌 훈련 때 였습니다. 쌍방훈련 도중 여단의 진격을 위해 신나게 화력지원을 하던 우리 장갑차에 왠 전차 궤도음과 함께 갑자기 통제관이 지프에서 내리더니 충격적인 전멸 판정을 내린 것이죠. 알고보니 적 전차가 측방을 파고들어 우리 행렬을 발견, 기동간 사격으로 몇분만에 소대 장갑차를 전부 완파시키고 말았던 것이죠.

 
어쨌든 모든 장갑차 조종수들 짬밥없을땐 RPM맞추느라고 개갈굼당하고, 폭염과 혹한속에서도 단차 정비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우리 조포훈련 갈굼당하고 얼차려받을때 조종수들 RPM못맞추면 망x산 꼭대기까지 뛰어서 장갑차 따라가야했었지요...    


1969년, 축구로 촉발된 전쟁 -Soccer War 내맘대로 Millitary

 

우리가 축구에 관한 격언처럼 쓰이는 말중에, 독일의 군사학자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의 명언을 이용한 말이 하나있습니다. 바로 "축구는 정치의 연속이다" 라는 말이죠. 정말 축구만큼 정치적 성격이 강한것도,  민족의식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스포츠도 없습니다. 정말 희안하게도 1969년에는 축구를 둘러싸고 국가간의 전쟁이 한판 벌어졌으니 그것이 바로 soccer war입니다.

 

 

1.개전전의 상황

 

1969년에 멀리 떨어진 중남미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에서 축구로 인한 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두나라 정부 모두 바보가 아닌 이상 축구경기 때문에 싸운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양국이 안고 있던 여러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었다.

 양국간의 전쟁이 벌어지게 된 이유 중 첫번째가 많은 엘살바도르인이 옆 나라인 온두라스의 국경을 넘어 경작 및 불법체류를 하게 된 사실을 우선 들 수 있다. 온두라스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들을 배척하기 시작했고, 1969년부터 벌어진 온두라스의 농지개혁에서 이들을 제외시키고 결국 축구전쟁 직전 추방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 주로 농업,축산품만 수출하던 온두라스와 공산품을 수출하는 인접국인 엘살바도르간의 무역수지 불균형과 비교적 소득이 높았던 온두라스의 엘살바도르 교민들, 두 나라의 독립 후 부터 일어난 모호한 국경선 문제와 뿌리 깊은 라이벌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 전쟁의 방아쇠로써 결정적인 사건은 1969년 6월 15일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벌어진 온두라스-엘살바도르간의 월드컵 중남미 2차 예선전 중 3:0으로 온두라스가 패배하자 자국팬들의 공격으로 온두라스 선수 3명이 집단구타당해 사망하고, 경기장에 있던 엘살바도르 관중들과 시비가 붙어 대규모 폭력사태로 번지게 되어 많은 온두라스인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그러나 이런 사건에도 불구, 두 나라 모두 탈락하여 1970년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함)

이 소식이 온두라스에 전해지자 흥분한 온두라스 군중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엘살바도르인의 거주지를 습격하여 약탈, 방화, 폭행을 가했고 온두라스 정부는 이후 국내에 거주하는 모든 엘살바도르인에게 추방명령을 내리게 된다. 열받은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 정부에 항의하며 자국 교민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으나 온두라스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한술 더 떠 엘살바도르인의 이민금지령을 내리자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를 미주인권위원회에 제소한다.

이에 그동안 각종 반정부 운동 및 각종 사회문제를 안고 있던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의 엘살바도르 정부는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고, 전쟁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온두라스와 국경문제에 대해 우위를 점하려는 속셈 등으로 전쟁을 결심하게 된다.

 

<1969년 당시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국경선>

 

*개전 전 양국의 병력 현황은 다음과 같다.

 엘살바도르 육군 20000/공군 1000명

 온두라스 육군 18000/공군 1600명 

 

2. 개전

 7월 14일 저녁 6시에 온두라스에 대해 F51머스탱이 엄호하는 엘살바도르 소속 더글라스 C-47 수송기가 폭격을 개시한다(수송기지만 화물창에 폭탄을 수납하여 투하함). 당시 이스라엘 공군이 중동전에서 수행했던 성공적인 선제타격의 영향으로 엘살바도르 공군도 선제기습을 통해 적군의 공군력을 약화시키는 목적으로 온두라스 공군기지가 주목표가 되었으며, 공군의 폭격 후에 엘살바도르 육군 3000명이 온두라스를 침공한다.

엘살바도르 육군은 온두라스의 2개의 주를 잇는 국도와 폰세카의 골포에 연한 온두라스의 섬들을 따라 전면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온두라스군도 다수의 병력으로 반격했으나 준비가 되있지 않아 방어전에만 치중하여 7월 15일 저녁, 엘살바도르군은 적극적인 공세로 온두라스 국경 8km를 넘어 전진했고 결국 Nueva Ocotepeque주의 주도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7월 16일 온두라스가 각 군에게 충분한 보급품과 병력을 전개시키자 엘살바도르의 공세는 한풀 꺾였고, 게다가 엘살바도르보다 규모가 약간 더 크며 보다 잘 훈련된 온두라스의 공군이 엘살바도르의 공군을 연거푸 격파하며 엘살바도르 육군의 연료보급소를 공습하자 엘살바도르는 고전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인접국 니카라과의 악명높은 반미성향의 독재자 소모사(Somosa)가 온두라스에 각종 무기와 탄약, 장비를 제공함으로써 엘살바도르를 괴롭히게 된다.

 

이런 온두라스의 강력한 공군을 제거하기 위해 엘살바도르는 몇 명의 미국인 용병 파일럿을 고용하게 되는데 이것은 나중에 전투기와 용병을 소재로 한 유명한 일본 만화 <에이리어88>에도 잠깐 소개되기도 한다. 양국 모두 이미 제트기가 전장의 주류인 시절이었지만 이래저래 2차대전의 프로펠러 전투기들을 사용했는데 엘살바도르의 경우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F-51 Mustang을 사용하였고, 온두라스측도 역시 미해군이 쓰던  F4u Corsair가 주력이었다.

한편 전쟁을 통해 온두라스 육군의 부패상이 드러나기도 했는데, 몇몇의 대대들은 서류상에서나 존재했으며 이들에게 주어진 비용을 몇 명의 고위 장교들이 착복하였던 것이다.

 

<M16A1을 들고 전투중인 엘살바도르의 군인>

 

 아이러니한것은 두 나라 모두 전쟁이 시작되자 국민들 대부분이 축구 시합 때처럼 열광했지만, 축구와는 달리 두 나라 모두 입대하는 장정들을 보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축구하다가 죽는 일은 없어도 전쟁하다가는 죽을까봐 그런건지...

 

<6.25이후 한국공군에서도 쓰였던 엘살바도르의 F-51mustang>

<프로펠러 전투기의 마지막을 빛냈던 온두라스 공군의 F4u Corsair>


전투 개시 후 줄곧 온두라스를 밀어붙이던 엘살바도르는 미주기구 OAS를 위시한 중남미국가들의 경제제재를 비롯한 압력 및 중남미의 영원한 '오야붕' 미국의 개입으로 침공한지 100시간만에(19일) 일단 정전하여,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간의 "축구전쟁(Soccer War 또는 Football war/100시간 전쟁이라고도 함)"은 막을 내리게 된다.

사상자는 엘살바도르는 900명, 온두라스가 1200명-모두 민간인 포함-정도가 발생했다고 한다

 

3.전쟁후의 상황

 

7월 29일 엘살바도르는 OAS와의 합의에서 철군에 동의하여 8월 2일 군대를 철수시켰으나 화평교섭은 결국 1976년에 이르러 타결되었다. 4년후 1980년에 상호 두 나라가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긴장관계는 막을 내리게 된다.

 

 전쟁 후에 엘살바도르의 산체스 에르난데스 정권은 물러나고, 과도한 전비 처리(1년 예산의 5분의 1인 2000만 달러), 온두라스 침공으로 인한 OAS국가들의 경제제재, 온두라스에서 쫓겨난 이민자들, 부정부패와 각종 사회문제 등으로 끝없는 혼란을 초래,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이 격화되어 국가는 완전 황폐화되어 90년대 말 정도가 되서야 나라가 안정을 되찾게 된다. 

온두라스도 대통령인 로페스 아레야노가 퇴임, 사회적 혼란과 주변국들의 정치불안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은 지속되지만 엘살바도르만큼의 우려할만한 내전은 벌이지 않고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1979년, 동지끼리의 전쟁 <중월전쟁> 내맘대로 Millitary

 

1. 개전 전의 상황

1979년 2월 17일 미국의 군사위성 'Big Bird'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중국-베트남의 국경지대에 전쟁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인공위성에 비친 중국군은 대량의 병력으로 베트남의 국경선을 두들기고 있었다. 이에 미국의 CIA를 비롯한 첩보부들은 놀람에 할 말을 잊어야했다. 그도 그럴것이 자기들을(미국)  패배시켰던 베트남을 군사/경제 원조로 도와주었던 반미혈맹의 나라가 바로 중국이 아니던가. 게다가 두나라는 같은 공산주의 이념으로 묶여진 형제국가가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는 한국과 일본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좋지가 않았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베트남을 자주 침공했고 베트남은 여러번 중국군을 패퇴시켜 중국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었다는 역사가 있다. 게다가 화교(재외 중국인)들은 동남아에서 흔히 그러듯 베트남에서도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동남아인을 비롯한 베트남인의 눈총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자기가 돈번다는데 뭔 비난이냐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사실 이 화교들이야 말로 그 나라의 부를 중국으로 빼돌리는 짭잘한 외화획득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옆나라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나 위쪽의 중국이 화교를 경제적 침탈의 도구로 사용한다고 여긴 베트남 정부는 자국의 모든 화교를 추방하는 외교적 조치를 실행하였고 이것은 당연히 중국이 전쟁까지 생각하게 하는 ‘강렬한 분노’를 불러왔다.


또 한가지 베트남 옆의 캄보디아 문제 또한 동남아시아의 '대형'인 중국을 열받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스탈린과 히틀러도 두손을 들 정도의 악명 높은 공산 독재자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붉은 크메르라는 뜻-크메르가 캄보디아인을 뜻하므로 ‘붉은 캄보디아’)가 론놀의 군사정권을 물리치고 1975년 캄보디아를 장악한 이래 캄보디아는 무시무시한 지옥의 세계로 탈바꿈한다. 원시공산주의를 신봉하던 폴 포트는 몇 가지 잔혹한 정치를 강행한다.

 <생긴건 유순한 이웃집 아저씨같지만 하는 짓은 극악무도한 도살자였던 폴 포트>


1. 공산주의의 이념에 따라 전국의 산업시설을 폐쇄하고 모든 국민은 농장으로 간다(전인구의 농민화)  

2. 시장경제체제를 부정하는 캄보디아에 화폐는 없다. 당연히 시장도, 회사도, 자본주의를 연상하게 하는 그 어떤-무엇도 없다. 모든 국민은 공동생산, 공동분배로써 크메르 루즈가 배급하는 식량을 먹고 살아야 한다.

3. 인텔리 반동분자(기술자, 식자, 대학 나온 사람 등등 먹물 좀 먹은 사람들)는 캄보디아에 있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모두 처형한다. (심지어는 안경을 껴서 인텔리같이 보인다는 이유로 처형)

4. 자본주의적 잔재를 없애기 위해 주요 교육, 의료, 위생기관 등은 모두 폐쇄한다.

5. 보다 완벽한 공산주의사회를 만들기 위해 각 국민은 <온산>이라는 제도로 서로를 감시한다. 

 

덕분에 캄보디아는 전 인구의 25%인 150만명에서 2백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어갔다. 국민의 4명중 1명꼴로 저세상에 갔다는 소리니 참으로 참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 ‘킬링필드‘는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는데, 주인공이 넘어져 구덩이에 빠졌을 때 그 구덩이가 온통 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해골밭이었던 장면을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아무튼 이런 극악무도한 폴 포트는 이런 삽질에도 모자라 2가지 대삽질을 추가했으니 첫째가 바로 중국에게 기대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전통적으로 한국의 ‘혐일’만큼 중국을 싫어하며 중국의 영향력을 두려워하는 나라인 베트남은 이런 폴포트의 행동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둘째는 캄보디아-베트남이 수세기동안 전쟁으로 원한이 있던 나라였기 때문에 폴 포트가 캄보디아에 있는 베트남교민들을 혹독하게 탄압한 것이다.  이런 사정은 베트남으로하여 월남전이 끝난지 3년 반이 지난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캄보디아에 군사개입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12년간의 주둔과 전투에도 불구하고 폴 포트는 베트남에 의해 개박살이 났기는 했지만 완전히 박멸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캄보디아가 내전으로 개판이 되어가자 베트남군은 89년에  철군한다.


<캄보디아를 진격하는 베트남 정규군>


<베트남군에 의해 포로가 된 캄보디아군들.
이같은 전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캄보디아에는 진정한 평화가 오지 못했다>

 

어쨌든 이런 연휴로 베트남은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캄보디아를 무력침공했고 이것은 마치 중남미국가를 자국 뒷마당으로 여기는 미국처럼 동남아의 '따꺼'이신 중국의 코털을 건드린 것이었다.

 

또 공산주의계의 '본좌' 소련과의 계속되는 반목으로 인해 중국의 힘을 보여줄 본보기가 필요했고 베트남이 소련을 지지하게 되자 한번 쥐어박아 볼만한, 때리고 싶을 정도로 얄미우며 만만한 먹이감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런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에 78년부터는 국경지대에서 마치 남북한이 대치한 DMZ를 방불케하는 방송을 통한 욕설전이 전개됬고, 이런 험악한 분위기와 소규모 국경 충돌이 계속되자 본격적으로 이 지방에 군사력을 증강시키게 된다. 이 같은 국경의 상황과 여러가지 판단 끝에 전쟁을 결심한 ‘덩샤오핑‘의 중국은 1979년 2월 17일 베트남에 대한 응징을 강행한다.  


<1979년 하노이 시내의 선전 포스터.
전통적인 적인 미국 외에 당면한 적인 중국이 추가되어있는 것이 보인다>



중국군은 당시 580만의 어마어마한 대군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중월전쟁에는 베트남의 온몸을 두들겨 팬다는 총력전, 전면전이 아닌 베트남의 머리만을 한 대 쥐어박는다는 ‘응징’을 목표로 하여 작은 수준의 병력을 파견하는 제한전, 국지전을 벌였는데, 이것은 몇 년 전에 중국사회에 피바람을 불러 일으켰었던 문화대혁명과도 관계가 있다. 당시 대숙청으로 인해 유능한 군 간부, 기술자등이 무더기로 없어져서 군대의 전투 수행능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전략 목표는 베트남의 북부만 공략한다는 개념 하에 ‘양더즈’ 지휘의 광저우 군관구의 20여만 병력으로 하여금 북부 베트남의 3개 도시인 랑손, 카오반, 라오카이의 3개 도시를 점령하는데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 5개 사단 10만의 병력을 선두로 북부의 소도시 몽카이, 하치만, 라이차우를 공격하여 진입로를 트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베트남군은 현재 대부분의 주요 정규군들이 크메르 루즈의 캄보디아를 박살내기 위해 파병(약 15만 병력)을 간 상황이라 본국에는 6개의 사단(북부에는 3개 사단 주둔)과, 공안부대라고 불리우는 2등급 부대-우리나라의 예비군같은- 10만명, 여성으로 이루어진 지원부대 등을 포함해 총 15만명 정도가 전부였다. 

<중국군에 의해 포로가 된 베트남 여군.
이들 여군들은 전쟁기간 내내 모든 전투에서 남자들 못지않은 맹활약을 펼쳤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마저도 아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베트남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북부에 병력을 이동배치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은 중국의 보병과 전차를 평야지대였던 하노이 주변에서는 막을 수 가 없다고 판단, 북부 산악과 밀림지대에서 적을 최대한 고착시켜 섬멸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2. 개전

 

<결의를 다지는 중국군 전차병들. 오른쪽에는 59식 초기형이나 62식 경전차로 보이는 전차가 보인다>


개전이 되자 중국은 [먼저 까불은 베트남을 자위차원에서 응징하며, 베트남의 영토는 원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는데, 이에 베트남은 [웃기지마라 중국. 니들이 침공했으니 이젠 맞짱이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중국 인민해방군(People's Liberation Army, 이하 PLA)은 북베트남의 빽빽한 밀림을 벌채하거나 태워버림으로써 중국제 신형 63식 전차와 59식 전차를 앞세우며 막대한 보병을 투입했다. 베트남군은 산악과 밀림을 이용한 진지에서 종심방어를 실시하여 지뢰와 각종 화기로 잘 무장된 방어진지에서 싸우다가 불리해지면 차후 방어진지로 교묘히 후퇴하였으며 베트남군의 장기였던 역습, 기습, 매복, 유격전등으로 중국군을 전쟁 내내 괴롭혔다.   

                    <전진하는 중국군 보병들>

게다가 당시로썬 고성능의 미국제  AN/PRC-6 무전기(대부분 베트남전에서 노획)를 이용하여 부대간 지휘/통신을 하고 휴대용 대전차무기인 RPG-7과 소련제 최신 대전차무기인 AT-3 새거 대전차미사일을 적절히 이용해 중국군 69식과 59식 전차, 62식 경전차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천안문 사태 당시 시위대와 대치중인 59식 전차. 아마도 59식 전차가 나온 사진으로썬 제일 유명한 사진이 아닐까 싶다>

<전쟁 기간 내내 중-베트남 양군에게 요긴하게 사용됬던 RPG-7을 든 중국군 병사>


그에 비해 중국군은 지휘/통제에 어려움이 따랐던 낙후된 통신체계 외에도 보-전(보병-전차) 합동전술이라고는 하지만 북베트남의 지형과 기계화전술의 미숙련으로 기껏해야 전차 뒤에서 보병이 졸졸졸 따라오거나 하는 형식이라 베트남군의 공격에 쉽게 보병과 전차가 분리되어 전차가 격파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군 숙청으로 지휘관의 질이 전반적으로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
 

<베트남군에게 격파된 중국군 전차. 62식 경전차로 보인다>


게다가 항일전, 국공내전, 항미원조전쟁(한국전쟁)의 경험으로 중국인민해방군으로써는 베트남에서도 이러한 보병의 대병력을 집중하여 작전지역내의 적보다 우세를 달성하여 돌입시킴으로써 적군을 포위, 섬멸하는 소위 ‘인해전술-Human Wave Tactics’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흔히 말하는 쪽수로 미는 무식한 전술이 인해전술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http://www.army.mil.kr/history/%C0%DA%B7%E1%BD%C7/%BF%EB%BE%EE%C7%D8%BC%B3/%C0%CE%C7%D8%C0%FC%BC%FA.htm 참조)
그러나 문제는 베트남의 지형, 베트남군의 화력, 경험, 훈련, 사기 면에서 인해전술이 먹혀들 상대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베트남군에게 포로가 된 중국군 보병. 베트남병사는 시모노프SKS소총을 손에 들고있다>

 

당연히 이러한 차이에다가 세계최강 미국과의 싸움에서 단련된 베트남군과 병력만 많을 뿐 전투경험을 비롯하여 많은 면에서 부족한 중국군과의 싸움은 이들에게 어려운 전투가 아니었다. 전투개시 3일이 되도록 베트남의 방어진지를 뚫지 못하자 중국군 수뇌부는 축차투입을 결정, 10만명의 대군을 또 다시 이 지역에 증원한다. 
 

                             <전사한 중국군 병사. 전방의 베트남전선을 뚫기 위해 많은 보병이 희생당했다>


결의에 찬 중국군의 엄청난 병력이 쏟아오자 베트남군의 동단과 몽카이의 방어선은 무너졌다.  중국군은 휘하 병력을 다그쳐 손실을 무시하고 싸웠는데 동단과 몽카이 방어선을 뚫는데 약 2천여명의 병력이 전사했고 중국군 전차 수십대가 격파됬다.

<중국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베트남 여군. 역시 SKS를 들고있다>


 28일에는 출혈을 감내하고 중국군이 점령한 동단시가 베트남군의 역습을 받고 다시 재탈환당한다. 베트남군은 대부분 보병의 ‘행군‘으로 리게 기동하는 중국군과는 달리 월남전에서 빼앗은 수백대의 M113장갑차를 이용하여 빠르게 기동하고 있었으므로 손쉽게 예비전력을 이동시켜 중국군에게 역습을 가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972년 남베트남의 쾅트리에서 촬영된 남베트남군의 M113.
많은 수의 남베트남 M113이 북베트남군에게 노획되어 중월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올렸다>


3월 1일, 중국군의 항미원조전쟁의 정예부대들로 랑손시를 향해 전면공격을 감행하여 베트남군을 어렵게 축출하게 된다.

 

<격전과 중국군의 폭파로 철저하게 파괴된 랑손 시가지>

  <중국군이 베트남의 시가지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


한편 공산주의계의 본좌이며 같은 공산국가이면서도 중국과는 한없는 라이벌인 소련도 이를 좌시하지 않고 있었는데, 중국이 베트남을 이길 경우 중국이 더욱 까불거라고 생각한 소련 정부는 '전투가 확대될 경우 될 경우 베트남에 원군을 파견하겠다'라는 성명을 발표해 중국을 크게 견제했다.

 

3월 2일 랑손을 둘러싼 전투는 최고조에이르러 결국 중국군이 랑손을 점령, 랑손시를 무자비하게 파괴한다. 랑손시는 중국군의 보복이었는지, 작전 상의 이유였는지는 몰라도 철저하게 파괴되어 말그대로 ‘초토화’되었다. 그러나 국제 상황도 점차 중국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으며, 막대한 전쟁비용, 투입한 병력의 피해와 피로도가 심각해 더 이상 전쟁을 벌이기 힘들자, 중국은 3월 6일 전투를 종료, 자국군을 철수시키기 시작한다.  

3월 15일 중국은 종전을 선언하고 드디어 이 장렬했던 전투는막이 내린다.  중국은 대략 베트남군 4만여명, 베트남은 중국군 41705명을 섬멸(사상자, 포로 모두 합계)했다고는 하는데 이것은 공산권 국가들이 흔히 하는 과장이며 실제적으로는 워낙 자료들이 서로 달라서 쓰지 않지만 중국군이 확실히 베트남보다 피해가 월등하다고 한다. 

 

<한 중국인이 과거 중월전쟁에서 전사한 가족을 위해 추모하고 있다>

 

베트남은 승리를 자축하지만 얻은 것은 캄보디아 침공과 중월전쟁으로 인한 영광뿐인 상처였다. '보트피플'같은 공산화의 부작용과 오랜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 막대한 전비 등으로 베트남은 수렁의 늪에서 허우적거렸고, 다행히 소련이 무너지면서 불러온 개혁과 개방의 바람, ‘도이모이‘같은 정책을 실시하면서 다시 동남아의 주요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한편 중국은 이 전쟁의 결과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중국군 수뇌부는 자국의 군대에 혹독한 매스질을 가한다.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의 경제력과 걸맞는 현재의 중국군이 태동할 수 있었던 개기는 이 중월전쟁이 끼친 막대한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반지의 제왕 심포니-2 반지의 제왕 심포니



사루만의 본진인 아이센가드가 나올때 흐르는 곡입니다. 원래는 초목이 무성하던 곳이었는데 사루만이 타락함으로써 오크,우르크하이들과 무기만드는 용광로들로 넘쳐나게되죠. 개인적으로 사루만 역을 맡았던 Christopher Frank Carandini Lee라는 배우를 아주 좋아합니다. 연기도 잘할뿐더러 영국식 억양의 깊고 울리는 목소리 ㅎㄷㄷ. 악당을 해도 이분이 하는 악당은 참 멋있습니다. 스타워즈에선 두쿠백작으로 나오시지만 다음편에서는 초반에 전사(그것도 목이...)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알고보니 70년대 영화 드라큐라에 주연이셨군요(어쩐지 좀 낯이 익다했어) 영국출신으로 현재 한국 나이 87세의 고령이십니다. 영쿡에서는 드라큘라가 많은 인기를 누렸었는 모양인지 여왕폐하로 부터 기사(Knight)작위를 수여받았습니다. Sir 군요 ㅋㅋ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던 곡 "The End of All Things"입니다. 집에 있는 DVD엔 수록되있는데 유튜브에는 올라온게 없네요.
할수없이 영화 장면을...
트롤과 싸우는 아라곤의 팔힘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왜 간달프형님은 독수리왕을 첨부터 불를것이지 나중에서야 불러서 일행 고생하게 만드는지..너무나 섹시한 골룸의 아리랑치기 등 여러모로 생각에 빠지게 하는 장면이죠. 특히 감동적인 샘 와이즈와 프로도의 진정한 우정! 어떤것에도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의지! 이런 위대한 작품을 쓴 톨킨은 정말 대단합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중에 가장 좋아하는 장면. 밀리면 이제 끝장이라는 비장미가 흠씬 풍기는 장면입니다. 아쉽게도 심포니곡에는 없어서 다시 또 영화장면을 퍼왔습니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할 사실은 영화와 소설이 다른 부분이 아주 많다는거죠. 특히 아예 이곳에 오지않은 할디르가 영화에서는 전사 ㅋ 에오메르는 왕따가 아니고 첨부터 왕의 곁에서 전투를 합니다. 후오른이나 좀 덜떨어진 인간들인 던랜드인도 나옵니다. 글고 소설에서는 레골라스가 그리 비중있게 나오지 않습니다. 영화에서는 방패타고 내려오질않나 완전 무협영웅으로 만들어놓더군요. 아무튼 자세한 것은 소설을 보시길.

The Lord of the Rings: Symphony -The Lighting of The Beacons 반지의 제왕 심포니



유튜브가 있기에 세상은 살만하다~
오프닝에서 쓰이던 곡이죠. 어쩌면 이렇게 소설과 어울리는 곡을 작곡했는지 대단합니다. 진짜 하워드 쇼어는 천재인듯 ;;
반지의 제왕 심포니-지휘/작곡 하워드 쇼어




The Lord of the Rings: Symphony -The Lighting of The Beacons
왕의 귀환 편에서 봉화대에 불붙이는 장면에 나왔더랬죠.



카잣-둠의 다리. 반지원정대에서 일행이 카잣-둠에서 격전을 벌인후 악마 발로그를 만나는 장면에서 흐르는 곡입니다.
대략 가사는 이렇다네요;;

Urus ni buzra!
Arrâs talbabi fillumâ!
Ugrûd tashniki kurdumâ!
Lu! Lu! Lu!
Urkhas tanakhi!

'Fire in the deep!
Flames lick our skin!
Fear rips our heart!
No! No! No!
The demon comes!'



블랙라이더-반지의 망령, 또는 흑기사, 나즈굴이라고 불리우는 존재들이 나올때 흐르는 곡입니다.
영화에서는 매우 이펙트있게 나왔었죠. 특히 펠비스트를 타고 날아다니는 마술사왕(Witch king)의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의외로 여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줬던 마초 마술사왕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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